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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평화-커버스토리] 한반도 평화 위한 ‘기도의 연대’에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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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화해위원회 작성일17-06-23 17:26 조회2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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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종합
[이땅에평화-커버스토리] 한반도 평화 위한 ‘기도의 연대’에 함께해 주세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만난 사람 - 이기헌 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의정부교구장)
2017. 06. 25발행 [14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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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로 연대할 것”을 당부하는 이기헌 주교.




분단 72년, 이산의 비극은 여전하다. 동족상잔이 벌어졌던 6월 25일, 참혹했던 그 날은 올해도 또 어김없이 다가온다. 그로부터 비롯된 갈등과 질곡은 오늘도 한반도에서 계속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날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기억하며 남북통일 기원 미사를 일제히 봉헌한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이자 의정부교구장인 이기헌 주교 역시 똑같은 아픔과 상처를 안고 분단 시대를 살아왔다. 평양의 순교자 집안 출신인 이 주교를 만나 그 아픔과 피란 얘기, 신앙 속에서 자라난 가족사와 순교사를 들어봤다. 글·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1950년 12월 4일. 대동강 철교가 끊겼다. 중공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 직전, 만 세 돌을 앞둔 이기헌 주교는 어머니 정용철(수산나, 1919∼2009)씨의 손을 잡은 채 ‘칼바람 몰아치는’ 대동강을 건넜다. 아버지 이재풍(베네딕토, 1912∼1969)씨는 이미 전쟁 전에 월남한 터였기에 이 주교는 둘째 누나(이영자 마르타)와 함께 셋이서 평양을 떠나야 했다. 연락이 닿지 못했던 큰 누나, 친척들과 함께 며칠 뒤 내려오기로 약속했던 둘째 누나와는 영영 이별하는 피란길이 됐다.

먼저 월남한 아버지와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부산교구 중앙주교좌성당. 혹한 속에서 칭얼대는 네 살배기를 등에 업고, 때로는 걸리며 끝없이 이어지던 어머니의 기나긴 피란길을 이 주교는 기억하지 못한다. 훗날 부모의 회고담을 통해 단편적으로 들었지만, 그 행로를 어떻게 공감할까.

이 주교 일가가 월남하게 된 건 신앙 때문이었다.

1850년대 서울에서 고조 이의송(프란치스코) 할아버지가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된 집안의 신앙은 병인박해 때인 1866년 10월 23일 서울에서 고조와 고조모 김이쁜(마리아), 증조 이붕익(베드로) 등 3위의 순교로 튼튼하게 됐고, 족보는 순교자로부터 새롭게 시작됐다.

이 주교의 조부 이태환(시메온) 대신리본당 사목회장과 같은 순교자 집안 출신인 할머니 임용환(요안나)의 신앙적 훈육은 또다른 순교자를 내게 된다. 당시 평양 기림리본당 주임이던 이 주교의 작은 아버지 이재호(알렉시오) 신부도 1949년 12월 7일 성당 사제관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갔고, 이듬해 1950년 10월 20일 평양 수복 직전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아버지가 공산당원들에게 끌려갈 때 저희 어머니께서는 신자들과 함께 트럭 앞에 드러누웠다고 해요. 그때 몸싸움이 얼마나 컸는지, 피란 뒤에도 어머니께서는 사제를 지키려 했던 본당 신자들의 용감했던 모습을 두고두고 들려주셨어요.”

‘대를 이은 순교자 집안’의 전통을 이어가며 하느님께 의지했지만, 수난은 계속됐다. 사제들은 다 잡혀가고 성당은 폐쇄됐다. 이를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신자들의 슬픔과 절망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순교하신 네 분이 조선왕조 치하 2차 시복 대상자로,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으로 선정돼 시복 추진이 이뤄지게 됐어요. 집안의 기쁨이 정말 컸습니다.”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던 이 주교 부모는 이북에서 내려온 교우들 모임에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대동강이며 대동교, 모란봉, 선교리, 동평양, 평양역 등에 얽힌 고향 이야기,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평양의 본당과 신부님들에 대한 이야기는 단골 메뉴였다. 그렇게도 고향을 그리던 월남 1세대 신자들은 이제 대부분 선종했고, 어머니 등에 업혀, 때로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내려온 이 주교가 70세를 넘겼다.

“북한에 신부님들이 계시지 않은데,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죽더라도 주일엔 성당에 가야 한다’고 했던 너희 누나는 혼자서라도 기도는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하고 지나치듯 말하던 부모의 회상은 이 주교의 평생 관심거리가 됐고, 기도 지향이 됐다. 이 주교는 신학교도 평양교구 소속으로 들어갔고, 사제품도 평양교구 소속으로 받았다.

“삼촌 신부가 평양교구 소속이고 순교자이니 평양교구 소속이 됐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두말없이 순종했다.

“그때도 평양교구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교구였어요. 하지만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으로, 사제로 살면서 평양교구 소속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통일되면 언젠가는 박해의 땅, 순교의 땅 평양에 돌아가 선교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꿨지요. 2027년이 평양교구 설정 100주년입니다. 그때는 꼭 평양에 돌아가 선교할 수 있겠지요? 그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민족의 십자가, 분단 속에서 나고 자라고 성장했으니 분단의 상처, 그 ‘아픔’이 없을 리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 주교는 평화를 위한 ‘기도의 연대’를 호소한다.

“우리 민족에게 최대의 공동선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반도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위해 우리는 기도로 연대해야 합니다.”

날마다 밤 9시면,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와 묵주기도를 꼭 바친다는 이 주교는 “평화를 위한 연대는 기도로 이뤄지는 연대가 그 시작”이라며 “그렇기에 파티마 성모님께서는 매일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하신 것이고, 우리도 파티마 성모님 뜻대로 평화를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바쳐야 할 것”이라고 당부한다.

이 주교는 이어 “용서야말로 평화를 실현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용서 없이 화해는 시작도 할 수 없기에 어렵더라도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면서 “그래서 2015년 12월 자비의 희년이 시작되기에 앞서 저는 파주 적군묘지에 찾아가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미사를 봉헌하게 됐고 해마다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고 했다.

이 주교는 “우리 스스로 매일의 삶에서 용서하는 사람이 돼야 하고 이 용서는 사회 안에서도 이뤄져야 한다”면서 “그래야 그동안 이뤄졌던 사회의 모든 불목과 장벽이 허물어지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주교는 요즘 “새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쓰는 정부, 손을 내밀어 대화를 나누는 정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참회와 속죄 성당에는 ‘실타래를 푸는 성모님 성화가 있습니다. 분단 속에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우리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성모님께서 매듭을 푸는 데 도와달라고 청합시다. 갈등과 질곡으로 얽힌 남북관계, 그 실타래를 푸는 데 우리도 기도로 한몫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위한 동참이며 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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